작곡가. 1913년 10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순동(朴順東)이다. 밀양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었고, 이후로도 별다른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다. 원래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으나,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병 치료에 가산을 다 써 버려 곤궁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악기 연주에 능했고, 열한 살 무렵 가출하여 약 10년 동안 여러 공연단체 소속으로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랑생활을 했다. 다양한 악기를 다 잘 다루었으나 특히 기타 연주에 능했고, 이후 음반으로 발표한 작품에도 기타를 사용한 것이 많았다.
박시춘이라는 예명을 써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1935년으로, 시에론(Chieron)레코드에서 발매된 <희망의 노래>가 현재 확인되는 첫 작품이다. 1936년까지 시에론레코드, 럭키(Lucky)레코드, 태평(太平)레코드에서 간헐적으로 작품을 발표했고, 이후 오케(Okeh)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되어 본격적으로 인기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 <불망의 글자>(이상 1937년), <애수의 소야곡>, <왕서방 연서>, <앵화폭풍>, <꼬집힌 풋사랑>, <총각 진정서>, <괄세를 마오>, <남장미인>, <항구마다 괄세더라>, <기로의 황혼>, <눈물의 춘정>(이상 1938년), <세상은 요지경>, <감격시대>, <안개 낀 상해>(이상 1939년), <울며 헤진 부산항>, <쓸쓸한 여관방>, <선부의 아내>, <눈 오는 네온가>(이상 1940년), <무정 천리>, <집 없는 천사>, <인생출발>(이상 1941년), <천리정처>, <목단강 편지>, <내 고향>, <청년고향>(이상 1942년), <황포돛대>, <서귀포 칠십 리>(이상 1943년) 등이 있으며, 1943년까지 발표한 작품 수는 확인되는 것만 270곡 이상이다. 이 가운데 <기로의 황혼>은 ‘치안방해’를 이유로 가두 연주가 금지되었다.
오케레코드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조선악극단에서도 기타 연주, 지휘, 작곡 등을 맡아 활동했고, 남성보컬팀 아리랑보이즈의 일원으로 무대에 직접 서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조선악극단 외에 약초(若草)가극단, 라미라(羅美羅)가극단, 신협(新協)악극대 등의 공연에도 참가했다. 1939년부터 1940년 사이에는 「박시춘 기타 작곡집」 세 권이 동인(同人)음악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1946년에 직접 박시춘악단을 조직해 공연을 하기도 했고, 그밖에 K.P.K악단, 악단 제일선(第一線), 은방울악극단, 빅타가극단 등의 공연에도 참가했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이 조직되자 지휘를 맡았고, 1947년 8월 이후 음반 생산이 재개되면서 고려(高麗)레코드, 오케레코드, 럭키레코드 등에서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눈물의 오리정>, <몽고의 밤>(이상 1948년), <금박댕기>, <낭낭 십팔세>, <신라의 달밤>, <청춘블루스>,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여인애가>, <고향만리>, <애수의 네온가>(이상 1949년), <애정산맥>(1950년) 같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특히 현인(玄仁)이 부른 <신라의 달밤>은 당시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널리 유행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우야 잘 자라>, <승리의 용사>(이상 1950년) 같은 이른바 ‘진중(陣中)가요’를 작곡하는 한편, 군예대를 이끌고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다. 1951년부터는 대구에 있는 오리엔트(Orient)레코드와 부산에 있는 스타(Star)레코드에서 <님 계신 전선>(1951년), <영너머 고갯길>, <전선야곡>(이상 1952년), <굳세어라 금순아>, <샌프란시스코>(이상 1953년), <승리부기>, <삼다도 소식>(이상 1954년) 등을 발표했고, 서울로 돌아온 뒤인 1954년부터는 유니버살(Universal)레코드, 미도파(美都波)레코드, 신세기(新世紀)레코드, 지구(地球)레코드 등에서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봄날은 간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상 1954년), <나는 울었네>, <물새 우는 강언덕>, <청춘고백>(이상 1955년),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 <청춘쌍곡선>, <아베크 토요일>(이상 1956년), <부산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가거라 슬픔이여>, <정순의 노래>(이상 1957년), <남성 넘버원>, <딸 칠형제>, <두 남매>, <오부자의 노래>, <신라의 북소리>, <하이킹의 노래>(이상 1958년), <가는 봄 오는 봄>(1959년), <사월의 깃발>(1960년), <사랑의 메아리>, <피리 불던 모녀고개>(이상 1963년), <우중(雨中)의 여인>(1965년), <돌지 않는 풍차>(1966년), <일자상서>(1970년) 등 수많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그런 가운데 1956년에는 직접 노벨(Nobel)레코드를 설립해 운영했고, 대한레코드축음기제작가협회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에 설립된 대한레코드작가협회에서는 이사장을 맡았고,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영화 제작이 활기를 띠자 영화음악에도 참여해, 1960년에 설립된 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나아가 오향(五響)영화사를 직접 설립해 영화 제작에 나섰고, 몇몇 작품에서는 감독을 맡기도 했다. <삼등호텔>, <딸 칠형제>(이상 1958년), <가는 봄 오는 봄>, <육체의 길>(이상 1959년), <장미의 곡>(1960년) 등이 오향영화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삼등호텔>과 <딸 칠형제>는 박시춘이 직접 감독을 맡았다.
1970년대 이후로는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1982년에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1996년 6월 30일에 노환으로 타계했다.